그동안의 많은 퀴어 영화는 사회드라마 장르에 편중되어 왔다. 성소수자가 법적, 제도적으로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서, 퀴어 주인공이 등장하는 순간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사회적 투쟁의 맥락을 떠안아야 했다.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마음 편히 영화를 볼 수 없었다. 주인공의 아픔을 함께 겪어야 했고, 쏟아지는 혐오를 함께 감당해야 했다. 그 피곤함이 퀴어 영화를 대하는 어떤 무게감이 되어버린 것도 사실이다.
〈이반리 장만옥〉은 그 무게감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퀴어 당사자들이 발 뻗고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코미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이유진 감독의 의도대로, 우스꽝스러운 안타고니스트로 묘사된 만옥의 전남편 철주의 횡포와 혐오 세력의 시위마저 우리는 깔깔대며 즐길 수 있다. 이반리 마을에서 펼쳐지는 결말부의 퀴어 퍼레이드 장면에서는 함께 소리 높여 응원할 수도 있다. 겁먹을 필요 없다. 웃음을 통해 우리를 무장해제 시킨 이유진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영화의 배경과 인물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영화는 중년 레즈비언 만옥을 주인공으로 세우며 퀴어 커뮤니티 내부의 세대 갈등으로 포문을 연다. 자신을 위해, 그리고 후배들을 위해 험난한 시대를 온몸으로 버텨온 만옥이 후배들에게 일종의 배신을 당하는 장면은, 선배 퀴어들이 감내해 온 고충을 깊이 공감하게 한다. 그러나 만옥은 또 다른 자신의 자리를 찾아 제 갈 길을 간다. 그 자리는 바로 원래 자신의 자리였던 고향 이반리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반리는 여전히 퀴어에게 가혹한 공간이다. 퀴어는 전혀 가시화되어 있지 않고, 더군다나 좁디좁은 커뮤니티에서 그런 특별함은 딱 먹잇감이 되기 좋은 구설수다. 한때 도망치듯 떠났던 고향으로 돌아온 만옥은 이제 당당히 자신의 자리를 주장한다. 평생 퀴어 후배들을 챙기며 살아온 만옥은 이반리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을 품어 낸다. 이장 철주의 눈치를 보며 살던 이웃들과 독거노인들, 그리고 누구보다 외로운 시간을 보냈을 트랜스젠더 고등학생 재연.
무지개만큼이나 다채로운 인물들이 살아 숨 쉬게 된 것은 배우들의 앙상블 덕분이다. 다양하고 복잡한 면을 지닌 만옥을 설득력 있는 한 명의 인물로 완성해 낸 양말복 배우의 호연이 빛나고, 모두의 마음을 훔칠 중년 부치의 매력을 발산한 김정영 배우의 연기는 오래 기억되고 회자될 것이다. 존재만으로 분위기를 만드는 색자 배우와 성재윤 배우의 연기는 다른 영화가 줄 수 없는 깊이감을 더한다. 꼼꼼하고 사려 깊은 캐스팅에서 이유진 감독의 영리함이 다시 한번 돋보인다.
퀴어 퍼레이드 장면을 위해 커뮤니티의 많은 손길이 모였다고 한다. 이미 다른 영화제에서 영화를 본 퀴어 관객들의 지지와 간증도 쏟아지고 있다. 영화의 위기가 자주 이야기되는 요즘, 영화로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함께 모여 나누는 이 공동의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그리워했던 영화적 경험이자 영화 매체의 본질 아닐까.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함께 웃고 떠들며 보는 것, 그것까지가 이 영화의 완성이다. 퀴어 당사자들에게 영화관이 편안한 연대의 공간이 되는 그 경험은 특히 소중한 추억으로 오래 간직될 것이다. (박준호)
자료 출처 : 디아스포라영화제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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