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고 눅눅한 지금을 살아가는 윤영은 현우 선배와 함께 울진으로 떠났던 마라톤 여행을 떠올린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은 개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다던 그 선배는 어느 날 완전히 윤영의 곁을 떠나버렸다.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시간과 공간들, 달리는 사람들 속 멈춰선 나, 알 수 없는 불안에 잠식당한 이미지와 사운드가 한바탕 화면을 가득 채우고 나면, 이불을 뒤집어쓴 채 방 안에 웅크려 있던 이영과, 완전히 떠나버린 현우가 윤영의 내면에서 처음으로 마주한다. 흰 바탕 위에서 깜빡이는 커서. 그것은 무한한 가능성인 동시에 끝없는 불안의 출발점이다. 비단 글을 쓰는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열려 있는 것 같지만 어딘가 막혀버린 삶의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다. 우리의 삶이 각자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올 때 누군가는 숨을 참고, 어떤 이는 반복되는 불빛들 사이를 박자로 쪼갠다. 자,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 내 안의 동굴에서 벗어날 시간. 일단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며, 이불을 빨자. 우리가 비록 (세상의) 유령일지라도.